Note

낮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동산에 작성일23-04-23 16:32 조회619회 댓글0건

본문

하늘에 뜬 달은 모름지기 휘영청 밝아야 계수나무 아래에서 토끼가 떡방아 찧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메밀꽃이라도 필 무렵엔, 달 밝고 고요한 밤, 평창 봉평의 어느 물레방앗간에서 장돌뱅이 허 생원과 성 서방네 처녀가 나눈 하룻밤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떠올려 볼 수 있을 터인데, 느닷없이 낮에 뜬 달은 하늘에 분명 떠 있기는 하나, 허름한 행색의 가난한 나그네가 정처 없이 변방을 떠돌다 지친 발걸음을 쉬어가듯 초라하고, 허공에 부는 잔바람에도 흔들릴 듯 가련하게 저 홀로 고적하기만 하였다.
생각해 보면, 그 낮달이 그리 보였던 것은, 하필 낮에 뜬 해와 가까이 있어 그 빛의 그늘에 가렸던 때문이고, 세상사에 고달픈 내 신세의 투영일 뿐 멀쩡히 뜬 달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세상 근심 없는 날 바라본 낮달은 창백하여 오히려 맑고 고결하고 청초하였다. 그 끌림으로 인해 내 눈의 동공이 확장되었을 때 창백한 달이 살쪄 보였으니, 그저 마음에 한껏 담아두면 될 뿐, 구태여 계수나무 아래 토끼가 떡방아 찢는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지구가 스스로 돌며 태양의 둘레를 돌고, 달이 스스로 돌며 지구의 둘레를 돌고, 태양이 지구와 달과 화,수,목,금,토의 별들을 거느리고 은하수 물결의 둘레를 억겁으로 도는, 이 지독한 끌림이야말로 형언할 수없이 놀라운 일이다. 서로를 밀쳐내지 않고 당기는 그 끌림으로 인해, 낮과 밤이 날마다 바뀌고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고 뭇 생명들이 암컷과 수컷으로 유별하다. 해와 달과 하늘과 땅의 자식인 나는 어느 오후, 달의 꿈속으로 빠져들어 함께 흘러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