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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 화가 - 춘사월 꽃은 엄혹한 겨울을 덥히나니... / 최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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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산에 작성일17-01-24 02:20 조회2,20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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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사월 꽃은 엄혹한 겨울을 덥히나니"

                                                                                                      최삼경(자유기고가)

 

강원도 영월 남면 연당리에 앉아 세상을 본다. 배거리 산을 휘도는 서강을 보고, 시퍼런 동해안의 바다를 보고, 백두대간의 옹골찬 산맥을 보고, 봄날의 화사한 꽃을 보고, 논두렁과 밭둑을 보고, 허물어져 가는 옛집을 보고, 푸른 나무를 보고, 파란 하늘을 보고, 사람들 마음을 보고, 마침내 제 마음도 활짝 열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소리를 들어도 뭐랄 것도 없이 춘천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를 빼고는 영월을 떠나 산 적이 없다고 한다. 그야말로 오리지널 향토인, 지역화가라 할 수 있는 백중기 화가를 찾았다. 어째서 이토록 한 곳에 머무는지 물었다.

“시골에서 작업하는 것이 생리적으로 내게 맞습니다. 시골의 적요함이 좋고 몸으로 체감해온 모든 것들이 시골에 있기 때문이죠. 번거로운 도시에 살며 작업을 한다는 것은 내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본의 가치가 모든 중요한 생명적 가치를 파괴하는데 그나마 시골은 중요한 삶의 본질을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시대의 변방이기에 그림으로 시대의 아픔을 증거할 만한 요인들이 많지요.”

그의 대답은 오히려 시골이기에 파운데이션 없는 시절, 그 민낯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얘기이겠다. 그는 육중한 백두대간 줄기의 원시적 자연이 그림의 원천이자 자산이라고 한다. 백두대간 산허리를 큰 줄기로 삼고 그 품안에 있는 풍광들을 그린다. 그래서인지 그의 산줄기 그림은 겹겹의 물감으로 두텁게 표현돼있다. 어머니의 넉넉한 품 안에 살아 숨 쉬는 것들. 들판과 들판의 꽃, 빈 집, 길모퉁이, 강바람, 햇살….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 안에 살아 숨 쉬는가.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마침내 화엄의 풍경을 이루는 것을 갈망한다고 한다.

누군가 그림은 그리움이라 했던가. 그의 바람대로 화실에는 산과 나무와 온갖 꽃과 바다, 하늘과 별과 언덕이 펼쳐져 있다. 거친 듯한 질감에 스케일은 넓고 크다. 드넓게 펼쳐진 밤하늘에는 금박을 입힌 듯 별들이 빛을 발하는가 하면 한 줄기 별똥별이 은빛을 내며 검푸른 바다로 돌진하기도 한다. 한 쪽에는 백두준령의 옹골찬 힘을 품은 산이 흰 테로 기품을 두룬 자작나무 그림에 가려져 있고, 작가가 아낀다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이 한약방의 약봉지처럼 곳곳에 걸려 있다. 그 옆으로는 물감이 뒤섞여 있는 말통들이 보이고 이미 쓰여진 붓과 쓰는 붓, 쓰여질 붓들이 두서없이 필통에 꽂혀 호출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풍경화가로서 다양한 소재를 그려왔다. 그렇지만, 고금동서 거개의 화가들도 풍경을 그려오고 있으니 이즈음에 드는 고민도 있지 않겠는가 싶어 그에게 물었다.

“여러 소재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습니다. 결국 어떤 소재이든 표현에 있어서 분명한 작가의 개성과 지문이 드러나야 하지요. 표피적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본질에 접근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모든 화가들의 평생 고민이기도 하겠지요. 이 시대에 미술이 어떤 가치로 존재하는가, 장식품 이상의 어떤 가치의 삶을 증명할 것인가가 미술가의 근본적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식품이 아닌 미술의 가치라… 어려운 문제이다. 문득, 강원도를 떠나본 적이 없는 그가 강원도의 고유문화랄까, 뭐 그런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강원도는 유장함과 소박함을 동시에 지녔습니다. 아래 지역을 여행하다 돌아올 때 죽령을 넘어서면 얼마나 강원도의 풍경이 위대한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주변을 둘러보면 고만고만한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지요. 그리고 산과 산 사이에 보이는 마을과 마을은 마치 섬과 섬 사이처럼 고독하나 그래서 고유하고 포근합니다. 소박한 꿈들이 점점이 박혀있습니다. 그것은 밖으로 진출하려는 기상이 아니라 다만 산 아래 고요히 살아가는 휴머니즘, 인정입니다. 시대가 이 인정을 배반하기에 이곳 강원도가 시대의 변방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 오히려 강원도만의 소중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며, 마치 그의 비밀스런 일기장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비록 가끔은 술기운으로 흐린 날씨가 되기도 하지만, 그는 본래 맑고 예민하고 높은 하늘을 모시고 산다. 편법과 후안무치가 국시가 된 듯 전국토가 최전선인 요즈음, 그는 보트피플에 오른 무방비의 난민들을 떠올린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엔 혁명의 불길이 솟아요. 오늘처럼 이렇게 거시기 하면 말입니다. 혁명의 불길, 그냥 내가 풍경 속으로 빨치산처럼 잠입하는 것 같아요. 나도 두려운 나의 실체라니….”

그의 가슴은 아직도 뜨겁고,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서 붓을 잡는다. 붓을 칼처럼 휘두른다. 오히려 푸른 산이 성성하고, 둥근 달이 덩실하고, 꽃과 숲이 수천만 화소로 발광한다. 뚝뚝하고 무질서하되 고분거리지 않는다.

백중기 화가는 지금까지 18회의 개인전과 90회가 넘는 단체, 부스전을 열었다. 서울을 비롯해 광주, 부산, 스위스 취리히까지…. 영월의 거처가 이제 예술의 거점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잠깐 교편을 잡다가 이렇게 전업 작가로 된 열정의 배후가 궁금했다.

“한때 나만 못나고 헛됐다는 열등감에 시달렸죠. 그러다 사람들이 제각각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을 알게 됐고, 우리는 본래 열등하구나. 그렇다면, 신도 세상도 다 열등하니 이 열등함을 벗 삼아 마주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열등을 마주하지 못하면 그 순간 폭력에 굴종하게 되고, 굴종함은 노예가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노예는 왕을 필요로 하고 왕을 섬기는 자는 철학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결론에 도달한 거지요. 지금 이 시원한 바람처럼 자연의 숨결이 신의 숨결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햇살과 별과 바람에는 열등이 없으니 수십 억 년 이라는 지구 역사상 나는 한 숨일 뿐이고, 우열의 구분이란 가당치 않은 일이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비로소 붓에 힘이 들어가더군요.”

그가 한줄기 나무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잎사귀가 떨어진 겨울나무는 제 몸으로 골똘해진다. 존재의 뼈를 고민하는 순수 낭만파. 너무 정직해서, 너무 가여워서, 너무 투명해서 세상의 서늘을 품은 나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들은 어찌 이렇게 서러운가. 강원도 변방의 전업작가에게 묻는 것이 적당한지 모르겠으나 마지막으로 정부의 ‘예술인 정책’에 대해 물었다. “내가 과문한지 모르나 정부의 예술인에 대한 어떤 유의미한 정책이 있는지 체험하지 못했다. 문화정책을 장기간의 계획으로 삼고 문화가 지닌 가치를 귀한 자산으로 삼는 나라를 보면 부럽다. 현재 예술이라는 것은 천민자본주의 최하위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을 포기한지 오래다. 정부의 품격자체가 천박하기 짝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사는 풍경은 갈수록 팍팍해진다. 그에게는 장성한 아들 둘이 있다. 스무 살 젊은 청춘들이 그저 인생을 맥없이 흘려보내게 만들어 많이 미안하다고 한다. 가장 꿈 많은 시절에 퇴장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국가와 기성세대의 직무유기라고 한다. 젊은이가 사라지는 국가에 무슨 희망이 있겠냐며, 그 희망이 없는 시대에 예술은 또 무슨 넌센스냐며 오히려 반문한다. 어찌 그의 아들들만의 얘기이고, 그 혼자만의 고민이겠는가.

가난한 화톳불 같은 백중기 화가 내외의 환대로 인터뷰 내내 따뜻했으나 조금 거시기 했다. 대문을 나서면서 어쩌면 방법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땅의 예술가들은 무조건 건강해야 한다는 거다. 건강해야 그나마 각자도생의 한바탕 인생에서 버텨나갈 것이다. 워낙에 술, 담배, 사람을 좋아하는 그인지라 강철한 건강이길 빌었다. 하여 자연과 인민의 행복을 끌어 올리는 그의 그림이 평화로운 햇살처럼 온 산천에 난분분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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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월간지 태백, 2016년 9월호. 사진/ 최삼경선생과 화실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안주삼아 곡차타령) 

 

 

 

댓글목록

김영숙님의 댓글

김영숙 작성일

갑자기 전시회 일정 볼려고 들어 왔다가  글 잘 읽었습니다.^^
3월달 갤러리 찾으러 또 한번 서울을 뒤져야겠네요

동산에님의 댓글

동산에 댓글의 댓글 작성일

늘 고마워요. 3월 전시장에서 꼭 뵈어요.
오늘 정월대보름이군요.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